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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28. 21:27

미술 벽화길 - 대덕구 중리동 명 소 이야기2014. 8. 28.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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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벽화길(대덕구 중리동) - 김홍도, 신윤복

요즘 티비에서 한창 옛 도심 구시가지가 벽화로 인해 많이 환경이 개선되고 밝아 졌다는 이야기

를 많이 한다.

예를 들면, 청구 서암골, 부산 보수동 골목, 통영 동피랑 마을 이런 곳들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

던 구시가지가 분위기가 밝아져서 활성화되고 어두워진 분위기에 조심히 다니던 곳도 사람들이

많아져 즐겁게 다니게 된단다

오늘 도서관 갔다오늘 길에 중리동 거리에서 본 미술 벽화길을 보고 문득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포스팅 해본다.

벽화는 조선시대 화가인 김홍도, 신윤복 등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신윤복 - 거문고 고르는 여인

이전에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선의 섬세함과 거문고 소리가 들릴것 같은 느낌의

그림이다.

 김홍도 - 타작

 김홍도 - 대장간

 김홍도 - 쟁기질

 김홍도 - 풍속화첩

 김홍도 - 씨름

 김홍도 - 서당

 

 

 신윤복 - 기다림

 신윤복 - 사시장춘도

 이런 대작인 그림들을 볼수 있는 곳? 대덕구 ..

길을 걷다 문득 이런 그림들에 취해서 명상에 잠겼다가 집에 와서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에 대하여

조사하여 포스팅 해본다.

 

김홍도(1745~1806)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 호는 단원 · 단구 · 서호 · 고면거사 · 취화사 · 첩취옹이다.


1. 가계·중요화력


만호를 지낸 진창의 종손이자 석무의 아들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화원)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을 그릴 때 한종유 · 신한평 등과 함께 동참화사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2. 성품


조희룡의 《호산외기》와 홍백화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금강전도〉의 시화첩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 · 도석인물 · 풍속 · 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 또는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3. 작품경향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주듯이, 주로 화보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 · 수파묘 등에서 정선 · 심사정 · 이인상 · 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4. 풍속화 작품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를 비롯하여 신윤복 · 김득신 · 김석신 · 이명기 · 이재관 · 이수민 · 유운홍 · 엄치욱 · 이한철 · 유숙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개인 소장)·〈무이귀도도〉(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단원도〉(개인 소장)와 〈섭우도〉·〈기로세련계도〉·〈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 등이 있다.

 

김홍도의 작품

 

 

 

• 작품명 : 서당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방금 훈장으로부터 회초리를 맞은 학동은 한 손으로 대님을 매고 다른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훈장의 얼굴에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고, 학동들은 까르르 웃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맨 아래 등을 보이는 학동의 표현이 흥미로운데,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구불구불한 옷선에서 쿡쿡 웃는 모습을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웃음과 울음의 표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청각적인 효과마저 살아나고 있다. 이 그림은 등장인물 간의 감정 표현을 적절하게 구성한 작품이다.

 

 

• 작품명 : 벼타작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일꾼들이 볏단을 메어치는 장면을 배치하고, 마름이 누워서 이를 감독하는 마당질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마름은 몰락한 양반이나 집주인이 농사일을 감독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김홍도가 이 보다 약 6년전에 그린 「행려풍속도병」의 「벼타작」에서는 마름이 의관을 정제하고 바라게 앉아 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술에 취해 비스듬히 누워 갓을 젖혀쓰고 긴 담뱃대를 문채 거드름을 피우고 있다. 일꾼들은 열심히 일하는 반면, 마름은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것은 양반과 상민이라는 신분차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름의 자세가 상징하듯이 이 작품에서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을 취해서인지 앞의 「행려풍속도병」보다 훨씬 풍자가 강하게 풍긴다.

 

 


• 작품명 : 행상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말을 탄 상인들이 장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장면으로 보인다. 담배를 피거나 담소를 나누며 긴장된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원풍속화첩에서 유일하게 펼친 양면을 한 화면으로 사용하였다.

 

 

 

• 작품명 : 논갈이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39.7×26.7cm


김홍도(1745-1816 이후)의 풍속화들은 대체로 소탈한 서민생활의 단면과 생업의 모습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또 당시 사람들의 생활 감정을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를 곁들여 생생하게 나타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김홍도 풍속화의 대표작《단원풍속화첩》에는 각 계층의 생업 장면, 생활 모습, 놀이 풍습 등을 담아내고 있는데 김홍도의 인간과 삶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주변의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화면을 구성하여 인물을 잘 부각시켰다. 연습 삼아 그린 작품처럼 보이면서도 투박하고 강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의 솜씨는 김홍도 회화의 특성을 보여준다. 김홍도가 이러한 풍속화들을 언제부터 그렸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30대 후반이 아닌가 싶으며, 이 풍속화첩의 제작 시기는 40대 전후로 추측된다.


< 논갈이>는 한 쌍의 소가 쟁기를 끌고 두 명의 농군이 쇠스랑으로 흙을 고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대각으로 솟구치고 있는 소라든지 쟁기를 잡은 농부의 몸짓 등이 힘든 농사일을 말해준다.

 

 

작품명 : 장터길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패랭이를 쓴 남자는 젓갈을 담은 통을 얹은 지게를 지고 있고 애기를 업고 있는 여인은 머리에 소쿠리를 이고 있다. 아마 장터에 가는 길에 만나 무언가 얘기를 나누는 장면일 것이다. 스냅사진 같이 생활중의 한 순간을 표현하였다.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여러 도구와 옷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남자는 정면, 여자는 뒷면으로 묘사하여 변화를 주기도 하였다.

 

 

 

작품명 : 대장간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단원풍속화첩은 갖가지 풍속장면을 종합한 화첩이다.이 화첩은 모두 25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목을 열거하면, 자리짜기, 대장간, 점괘, 노중상봉, 씨름, 주막, 빨래터, 나룻배, 고누놀이, 기와이기, 장터길, 활쏘기, 우물가, 그림감상, 서당, 편자박기, 논갈이, 춤추는 아이, 고기잡이, 초행, 길쌈, 담배썰기, 행상, 벼타작, 점심이다. 이 그림은 대장간의 풍경을 그렸다. 풀무에 불을 피워 쇠를 달군 뒤 한 대장장이가 달군 쇠를 짚게로 붙들고 다른 두 사람은 망치로 메질을 하고 있다. 앞에 있는 아이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다.

 

 

작품명 : 무동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삼현육각의 훙겨운 가락에 맞추어 무동이 춤을 추고 있다. 두 팔의 한삼자락을 멀리 위 오른쪽으로 감아주고 오른발을 번쩍 들어 도약하는 경쾌한 발동작 그리고 만면에 웃을 띠고 왼쪽으로 숙인 고갯짓을 통해 춤의 절정적인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을 표현한 필선은 김홍도 특유의 힘이 배어 있는 딱딱한 철선묘(鐵線描)인데, 꺾임이 매우 힘차고 거친 갈필과 속도감을 더하여 묵직한 동감을 표현하였다. 반면에 악사들은 속도감을 줄인 딱딱한 철선묘로 일관하여 대조를 이루고 있다. 채색을 할 때에도 무동에게는 짙고 순도가 높은 색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표현기법의 변화를 통하여 중심 인물을 생동감 있게 부각시켰다.

 

 

 

작품명 : 자리짜기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단원풍속화첩은 갖가지 풍속장면을 종합한 화첩이다.이 화첩은 모두 25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목을 열거하면, 자리짜기, 대장간, 점괘, 노중상봉, 씨름, 주막, 빨래터, 나룻배, 고누놀이, 기와이기, 장터길, 활쏘기, 우물가, 그림감상, 서당, 편자박기, 논갈이, 춤추는 아이, 고기잡이, 초행, 길쌈, 담배썰기, 행상, 벼타작, 점심이다.


이 그림은 자리짜는 모습을 그렸다.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질을 하고 있다. 부모님들이 일하는 가운데 등을 돌려 앉은 아이는 책 읽기에 열중이다. 어둠속에서 어머니는 떡을 썰고 한석봉은 글씨를 써서 서로 경쟁하였다는 한석봉의 설화가 연상된다. 조선시대 교육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 작품명 : 씨름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이 그림은 씨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면 중앙에 그려진 씨름꾼들을 보면, 한쪽은 낭패의 빛이 역력한 표정이고, 다른 한쪽은 상대를 넘기기 위해 마지막으로 기를 바짝 모우고 있다. 이에 따른 구경꾼들의 반응도 흥미로운데, 화면 오른쪽 위에 있는 구경꾼들은 상체를 앞으로 굽히면서 승리의 순간을 열렬히 환호하고, 오른쪽 아래의 두 사람은 자신의 편이 넘어가는게 얼마나 안타까운지 입을 벌리고 놀라서 몸을 뒤로 제쳤다. 화면의 맨 아래에 등을 보이고 있는 어린이는 이러한 열띤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엿을 팔고 있는 엿장수를 쳐다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홍도의 치밀함과 해학성을 엿볼 수 있다. 승리와 패배, 이에 따른 환호와 안타까움, 그리고 야단법석 가운데 무관심 등 각 인물에 대한 절묘한 상황설정과 탁월한 심리묘사가 이 그림의 매력이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등장인물의 감정이 주변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화면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씨름>은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성공한 작품이다.

 

 

작품명 : 기와이기
• 작가 : 김홍도
• 제작연대 : 18세기 후반
• 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 재 료·크 기 : 종이에 옅은 채색, 27.0×22.7㎝


목수들이 기와를 올리고있다. 대패질 하는 사람, 기둥의 수직을 맞추는 사람, 홍두깨 흙을 올리는 사람, 기와를 이는 사람, 모두 집짓는 데 열중이다. 다만 주인은 밑에서 던지는 기와를 장난스럽게 받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한다. 김홍도는 풍속화에서 단순히 풍속장면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이처럼 스릴있는 장면을 넣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87473579&page=1#answer1

 

신윤복 [申潤福, 1758~?]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덕여(德如) 또는 입부(笠夫·笠父), 호는 혜원(蕙園). 김홍도·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3대 풍속화가로 지칭된다. 풍속화뿐 아니라 남종화풍 산수와 영모화에도 뛰어났다. 속화를 즐겨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며, 부친 신한평과 조부는 화원이었으나 그가 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전해진 작품에 남긴 간기(干紀)로 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처네를 쓴 여인》에 있는 1829년이 가장 하한인 바 대체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직업화가로 당시 수요에 따른 많은 풍속화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작으로 국보 제135호로 지정한 《혜원전신첩》이 있다. 사회 각층을 망라한 김홍도 풍속화와 달리 도회지의 한량과 기녀 등 남녀의 은은한 정을 잘 나타낸 그림들로 동시대의 애정과 풍류를 시사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탄금》 등 6점으로 된 화첩도 명품이다. 초상기법으로 그린 《미인도》는 조선여인의 미를 잘 드러낸 걸작으로 손꼽힌다.



< 신윤복의 작품세계 >



미인도 [美人圖]
비단에 채색 114.2*45.7cm

간송미술관

< 蕙園 申 潤 福 의 미술 세계 >

신윤복 申潤福 1758(영조 34)~? 조선후기의 화가.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 화원(畵員). 벼슬은 첨정(僉正)에 올랐다.
 혜원 신윤복은 정확한 생존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은 화가이나, 김홍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신윤복은 김홍도에게서 받은 영향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롭게 변화시켜서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창안하여 김홍도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풍속화의 대가가 되었다. 시의 서민 사회의 풍속을 매우 세밀하게 잘 그려, 김홍도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힌다. 훌륭한 그림을 많이 그려 한국 미술사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양반 중심의 체계적 문화에서 벗어나 부녀자들을 그리는 등 그림의 소재의 다변화를 꾀하였다.

시골 주막의 서정적인 풍속을 날카로운 화필로 잘 그려냈다. 현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참된 모습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사회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며 그의 작품 중 대다수는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주류이다. 비록 김홍도처럼 임금님 밑에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그만의 대단한 선과 아름다운 필체로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의 작품대다수는 항상 부녀자들이 나오며 양반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대부분 양반들은 앉은 자세로 향연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며 부녀자들은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따르며 기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놀이나 흥겨운 농악을 그린 김홍도에 비해 신윤복은 세밀하고 표독스러운 느낌을 멋지게 자아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물의 모습을 한층 더 화사하고 화려하게 돋보이기 위하여 배경을 그 색에 맞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윤복 풍속화의 진면목은 <단오풍정端午風情>이나 <방문訪問> <검무劍舞> <선유도船遊圖> <월하정인月下情人> <연당야유도> <미인도> <송정아회> <야연도> <연소답청> <이부탐춘> <전모 쓴 여인> <풍속도>등의 작품에서 볼 수가 있다.

 작품보기 

단오풍정[端午風情]
종이에채색.

방문[訪問]
 종이에담채.

선유도[船遊圖]
종이에담채.

월하정인[月下情人]
종이에담채.

쌍검대무(雙劍對舞)
종이에채색

청금상련(廳琴賞蓮)
종이에 채색

월야밀회(月夜密會)
종이에 채색

연소답청(年少踏靑)
종이에 채색

송정아회(松亭雅會)
종이에 담채

묘견도(猫犬圖)
비단에 담채

미인도 [美人圖]
비단에 채색 .

전모쓴 여인
비단에 채색

원본출처: 네이버 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180570093&qb=7Iug7Jyk67O1&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8iJ35Y7tNssbl2Kj8ssssssto-482632&sid=U-8ZpHJvLBUAACruF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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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pagilove